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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육연원민
작성일 26-09-08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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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은조(헤로니모 임김) 피델 카스트로와 아바나대 법대 동기인 그는 쿠바 혁명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혁명 정부에서도 고위 간부를 지내다가 만년에는 쿠바 한인 사회 재건과 후손들의 정체성 회복에 앞장섰다.
ⓒ KBS
1959년 친미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고 남북아메리카 최초의 공산 국가를 건설한 쿠바 혁명은 국제정치 판도와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쿠바를 시작으로 공산 혁명의 물결이 중남미 전역으로 번지는 가운데 1961년 미국의 피그스만 침공 실패와 이듬해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 시도로 동서 양 진영은 3차대전 직전까지 가는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았다.
오늘날 시。에서 보면 쿠바 혁명은 나라를 고립시키고 경제를 정체시킨 '실패한 실험'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부패한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미국 예속의 사슬을 끊은 쾌거로 칭송받았다. 혁명군을 이끈 피델 카스트로는 국민 영웅이 됐고 아르헨티나 출신의 풍운아 체 게바라는 전 세계 젊은이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유럽은 물론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과 청년들까지 열광했다.
혁명은 쿠바 한인 사회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동포들은 대부분 가진 것 없는 노동자여서 토지 무상 분배와 무상 의료·교육 등을 내세운 혁명군을 지지했다. 천도교 신도들은 혁명 정부의 인종·계급 차별 철폐가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일치한다며 환영했다.
그러나 숙박업, 보석상, 의류。, 식당 등을 운영하던 일부 동포 자산가는 재산을 몰수 당할 것이라는 소문에 쿠바를 떠나 미국 등 인근 나라로 옮겨갔다. 피그스만 침공 때는 한인 후손들이 혁명군과 반혁명군으로 갈려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도 빚어졌다.
쿠바 한인들은 두 번이나 사기 당한 피해자
▲ 임천택 일가 임천택(가운데) 김귀희(오른쪽) 부부는 9남매를 두었다. 맨 왼쪽이 장남 임은조.
ⓒ 국가보훈부
쿠바 혁명의 주역 가운데는 동포 임은조(헤로니모 임김)도 있었다. 아바나대 법학과에서 만난 동갑내기 피델 카스트로와 평생 동지가 되어 게릴라 활동을 벌이다가 혁명 정부에 참여했다. 체 게바라 산업부 장관의 핵심 참모를 맡고 차관급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1926년 9월 30일 마탄사스 한인 마을에서 임천택 김귀희 부부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임천택이 2살 때 홀어머니 손을 잡고 한국을 떠났으니 임은조는 이민 2.5세다. 임천택 부부는 그 시절 다른 동포와 마찬가지로 선박용 밧줄 원료로 쓰이던 에네켄(용설란의 일종) 농장에서 일했다.
쿠바 한인들은 두 번이나 사기를 당한 피해자였다. "북미 묵서가(墨西哥·멕시코)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라는 <황성신문> 거짓 광고를 보고 일포드호에 오른 한인 1033명은 1905년 5월 8일 멕시코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했다. 광고 문구와 달리 혹독한 악조건 속에서 노예 노동에 시달렸다.
▲ 멕시코 농부 모집 광고 황성신문에 실린 농부 모집 광고. 멕시코는 부강국이어서 노동 조건이 좋다고 적혀 있었다.
ⓒ 독립기념관
계약 기간을 마친 뒤에는 조국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해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하는 수 없이 재계약하고 눌러살던 중 쿠바에서 왔다는 어떤 한인이 "쿠바는 천국 같은 꿈의 나라다. 사탕수수 자르는 사람들이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일한다. 물 대신 우유를 마시고 맥주는 얼마든지 있다"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말에 혹한 멕시코 동포 277명이 타마울리파스호를 타고 1921년 3월 4일 '약속의 땅'으로 향했다.
이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사탕수수 자르는 일은 가시 돋친 에네켄 자르는 것보다 덜 위험하긴 해도 익숙지 않아서 더 힘들었다. 1차대전 직후 폭등했던 설탕 가격도 미국이 원료 수입처를 동남아 등지로 다변화하면서 폭락했다. 노임과 일자리가 줄어들자 한인 일부는 마나티 사탕수수 농장에서 마탄사스 에네켄 농장으로 옮겨갔다.
피땀 흘려 번 돈을 쪼개 독립 자금으로 기탁
▲ 민성국어학교 임천택이 쿠바 마탄사스 한인촌에 세운 민성국어학교. 태극기와 쿠바 국기가 함께 게양돼 있다.
ⓒ 한국이민사박물관
▲ 대한여자애국단 마탄사스지부 독립운동단체 대한여자애국단 마탄사스지부가 1938년 결성식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맨 오른쪽이 임천택, 앞줄 맨 오른쪽이 김귀희다.
ⓒ 한국이민사박물관
한인들은 그토록 피땀 흘려 번 돈을 쪼개서 독립 자금으로 보내고 학교를 세워 자녀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그 중심에 임천택이 있었다. 그는 안창호·박용만·이승만 등이 이끄는 미주 독립운동단체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해 쿠바지방회를 결성했다. 서기, 총무, 회장, 고문을 역임하며 1923년 쿠바 한인 독립선언 시위를 주도했다. 1922년과 1923년에는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에 각각 민성국어학교와 진성국어학교를 세우고 3개 지역의 한인지방회를 규합해 재쿠바한족단을 조직했다. 김귀희도 대한여자애국단 마탄사스지부를 만들었다.
멕시코에서 개신교를 받아들인 임천택은 우연히 국내 천도교 인사와 연락이 닿아 천도교로 개종했다. <개벽>, <신여성>, <조선농민>, <신인간> 등 천도교 잡지들을 받아보며 신앙 모임을 꾸려갔다. 1930년 3월 카르데나스에 천도교 교당도 설립했으나 천도교 중앙총부가 친일 행보를 보이자 1937년 폐쇄했다.
임천택은 한인들에게 천도교식으로 성금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끼니 때마다 식구 수대로 쌀 한 숟가락을 덜어내 성미(誠米)를 마련한 뒤 돈으로 바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지지 집회를 열고 후원금을 보냈으며, 1940년 광복군 창설 때도 지원했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임정 공식 문서에 후원 내역을 기록하고 1938년 임천택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백범일지>에는 "쿠바에서는 임천택 등 제씨가 임시정부를 후원했다", "쿠바 한인 교포는 전부가 정부 유지 발전에 공동 책임을 지게 되었다"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기록상 송금액은 1937~1944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1289달러, 임시정부 264달러다.
임천택은 1941년 4월 3일부터 7월 17일까지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 '쿠바 이민사'를 11회 연재해 1954년 책으로 펴냈다. 1985년 별세했으며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뒤늦게 받았다. 미수교국 국적자로는 처음이었다. 2004년 유해가 봉환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 임천택의 ‘쿠바 이민사’ 임천택은 <신한민보>에 ‘쿠바 이민사’(원제는 ‘큐바 이민사’)를 연재한 뒤 1954년 책으로 펴냈다. ‘쿠바 이민사’ 앞 표지(왼쪽)와 본문.
ⓒ 한국이민사박물관
▲ 모국에 안장되는 임천택 2004년 4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관에서 임천택(맨 앞)을 비롯한 해외 애국선열 6위의 합동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9살 때 처음 신발 신어 볼 정도로 가난하게 자라
임은조는 다른 한인 2세나 3세처럼 가난하게 자랐다. 9살 때 처음 신발을 신어 보았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세운 민성국어학교를 다니고 아버지가 이끄는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의 학생부에서 활동했다. 1946년 마탄사스종합대를 거쳐 이듬해 아바나대 법과대에 들어갔다. 쿠바 한인 대학생 1호였다.
"법은 정의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법학을 전공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고단한 생활 속에서 사회 모순을 깨닫고 이른바 운동권이 됐다. 1947년 학생 대표로 피델 카스트로의 멘토인 에두아르도 치바스를 만난 뒤 그가 세운 진보정당 오르토독소에 가입했다. 같은 해 카스트로도 입당했다.
고향 마탄사스 관리들이 의료비를 착복한 것에 항의해 임은조는 동료들과 시청사를 。거하고 농성을 벌여 투옥됐다. 2개월 만에 무죄 석방됐으나 법률가의 꿈을 접고 직업 혁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5년제 법대 졸업을 1년 앞둔 1949년 학교를 그만두고 반독재 투쟁에 뛰어들었다. 마탄사스 일대에서 。조직으로 운영되던 도시 게릴라로 활동하며 선전물 배포와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아버지한테도 비밀에 부쳐 바티스타가 쫓겨난 뒤에야 지난 10년간의 행적을 털어놓았다.
임은조는 경찰청 인사·법무담당관을 지내다가 1963년 산업부 인사담당관으로 옮겨 산업부 장관이던 체 게바라와 4년간 함께 일했다. 1965년 창당한 쿠바 공산당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88년 식량구매국장을 끝으로 중앙정부에서 물러난 뒤에도 아바나 근교 기테라스 시장을 지낸 데 이어 차관급인 동아바나 인민위원장으로 뽑혀 한인으로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은퇴 후 정부로부터 선물 받은 소련제 라다 승용차로 개인택시 영업을 하며 노후를 보냈다.
▲ 개인택시 모는 임은조 임은조는 정부로부터 선물 받은 소련제 라다 승용차로 개인택시 영업을 하며 노후를 보냈다. 2001년 말 아바나 시내에서 손자 넬슨 임 주니어를 뒤에 태우고 가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 커넥트픽쳐스
대한제국은 무능했고 대한민국은 무심했다
멕시코·쿠바 이민 1세는 아무도 살아서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광복 후 극심한 혼란을 겪다가 전쟁까지 터지니 2세들도 귀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주적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 광복의 목표가 사라지자 오히려 한인 공동체 결속이 약해지고 민족 정체성도 희미해졌다. 새로운 동포 이민자가 계속 유입된 미국과 달리 오랫동안 모국과 단절되고 불균형한 남녀 성비 탓에 현지인과 결혼을 많이 한 것도 원인이었다.
남북한 정부도 쿠바 한인을 살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망국 직전의 대한제국은 무능했고, 신생 대한민국은 무심했다. 1949년 수교 후 1952년 양유찬 주미대사가 마탄사스 한인 마을을 찾아 임천택을 비롯한 동포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반공 이념을 강조했을 뿐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위로나 지원 약속 같은 것은 없었다.
혁명 정부는 한국과 단교하고 북한과 수교했다. 북한 외교관들이 쿠바 한인 마을을 방문하고 북한 학생들이 유학을 오기도 했다. 임은조는 1967년 북한 초청을 받아 평양, 원산, 금강산 등을 둘러봤다. 북한은 쿠바 한인을 체제 선전에 이용하려고만 했을 뿐 따뜻한 손길을 내민 적이 없었다.
▲ 방한하는 임은조 임은조(왼쪽)가 박금성과 함께 쿠바 동포로는 처음으로 1995년 8월 10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환영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임은조는 박금성(파블로 박김)과 함께 1995년 서울에서 열린 광복 50돌 세계한민족축전에 참석했다. 각국에서 온 동포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쿠바한인회 재건과 후손들의 정체성 회복에 힘쓰기로 다짐했다. 쿠바 전역에 흩어진 한인 후손을 찾아다니며 실태를 파악하고 한인회 설립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쿠바 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했다. 북한대사관에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비공식 단체인 한-쿠바친선협회(쿠바 한인후손회)에 머물다 보니 2001년 3월 25일 미국한인장로회 도움으로 마나티항에 세운 '쿠바 한인 이주 80주년 기념탑'의 법적 소유와 관리 주체도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성과가 적지 않았다. 2000년 4월 선교사 이일성과 함께 한글학교를 개설하고 멕시코 이주 100년을 맞는 2005년에는 미국 시애틀 한인연합장로교회 지원을 받아 마탄사스에 한인 이주 기념비를 건립했다. 임은조는 2003년 10월에도 재외동포재단 초청으로 방한했다. 마탄사스종합대 교수를 지낸 셋째 여동생 임은희(마르타 임김)는 역사학자인 쿠바인 남편 라울 루이스와 함께 2000년 '쿠바의 한인들'을 스페인어와 한국어로 펴냈다.
▲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비 멕시코 한인 이주 100주년을 맞아 2005년 마탄사스 한인촌에 세운 기념비. 주변에 이민 초기 한인들이 재배하고 채취했던 에네켄이 심어져 있다.
결실 이뤄가는 임천택 부자의 뿌리 찾기 노력
쿠바 한인들의 뿌리 찾기 움직임에 또다른 '조국의 절반'인 한국도 화답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1996년부터 해마다 아바나 국제무역박람회에 참가하자 쿠바 한인들은 한국 대표단을 따뜻하게 맞았다. 2001년 4월 이만섭 국회의장을 비롯한 국제의원연맹(IPU) 총회 대표단은 한복을 차려입은 임은조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표단은 귀국 후 한국 소개 책자와 영상 자료, 전통 악기 등을 보냈다.
코트라는 2005년 아바나 무역관을 개설했으며,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는 2012년 쿠바지회를 설립했다. 2006년 이규형 외교부 제2차관과 2014년 조규형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은 쿠바를 방문했다. 2013년 TV 드라마 <내조의 여왕>이 방송된 것을 시작으로 한류가 거세게 불어닥쳤고 2024년 한국과 쿠바는 정식으로 수교했다.
임은조는 2006년 1월 19일 세상을 떠나 쿠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쿠바 정부는 최고 등급을 비롯한 9개의 훈장을 수여했다. 2019년 재미동포 전후석이 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를 선보여 국내에도 임은조의 이름과 경력이 널리 알려졌다.
▲ 영화 ‘헤로니모’ 포스터 2019년 11월 21일 국내 개봉할 당시의 ‘헤로니모’ 포스터. 쿠바 혁명의 주역이자 쿠바 한인 사회의 지도자였던 임은조(헤로니모 임김)의 일대기를 담았다.
ⓒ 커넥트픽쳐스
그가 청년과 중년 시절 추구했던 혁명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노년에 힘을 쏟았던 과업은 결실을 이뤄가고 있다. 2014년에는 국가보훈처와 민주평통 중미카리브위원회 지원으로 아바나에 쿠바 한인후손 문화회관이 문을 열었다.
오리엔테주 종합대 경제학과 교수인 장남 넬슨 임은 2006년 경희대 국제교육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돌아갔다. 임천택의 증손녀 아자리아 임은 2013년 쿠바 유학생 1호로 입국해 한남대 린튼글로벌칼리지를 졸업한 뒤 영국에서 살고 있다. 충남대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증손자 엥 임 펜잔 안토니오는 2024년 대한민국 국적을 얻었다.
▲ 쿠바 한인 한국 유학생 1호 임천택 증손녀인 아자리아 임이 2013년 2월 27일 한남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태극기를 들고 선배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한남대
▲ 참배하는 임천택 손녀 2024년 12월 재외동포청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쿠바 동포 노라 임 알론소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할아버지 임천택 지사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 재외동포청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쿠바 한인 이민 100년사> <쿠바의 한인들> <쿠바 한민족사 그 가슴 시린 100년의 실록> <외로운 여정-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 <독립유공자 공훈록>
지 않았다.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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